전자책 시대에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종이책을 선호합니다. 페이지를 넘기는 감촉, 책에서 나는 종이 냄새, 책장에 꽂혀 있는 물리적 존재감은 전자 기기로는 대체할 수 없는 독서의 감성을 자극합니다. 하지만 종이책에 대한 선호는 감성적인 차원을 넘어, 실제로 ‘기억력’ 측면에서도 의미 있는 차이를 만들어냅니다. 종이책을 읽을 때 뇌가 정보를 처리하는 방식은 전자책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며, 그 차이는 장기 기억 형성과 이해력에 실질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이 글에서는 종이책과 전자책이 뇌에 작용하는 방식을 과학적·심리학적으로 비교하고, 왜 종이책이 정보를 더 깊게 남기고 오래 기억하게 만드는지를 구체적으로 분석합니다.
종이책은 손의 감각과 시각 공간 정보가 결합돼 기억에 더 강하게 각인된다
종이책이 전자책보다 기억에 더 오래 남는 이유 중 가장 뚜렷한 차이는 ‘감각의 다양성’입니다. 종이책은 단순히 눈으로 읽는 것을 넘어, 손으로 페이지를 넘기고, 책의 두께를 느끼며, 표지와 재질, 냄새 등 다양한 감각이 동시에 작용합니다. 이러한 복합 감각 자극은 뇌의 해마와 전전두엽에 강한 인지적 흔적을 남깁니다. 특히 종이책을 넘기며 “어디쯤” 읽고 있는지 인지하게 되는 ‘물리적 위치 기억’은 정보의 구조와 내용을 함께 기억하게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문장을 읽고 “왼쪽 페이지 위쪽쯤에 있었어”라고 기억하는 것은 시각 정보와 공간적 기억이 결합된 형태입니다. 반면 전자책은 화면 스크롤이나 페이지 전환이 물리적 감각 없이 이루어지며, 화면 자체가 균질하므로 이러한 위치 기반 기억 형성이 어렵습니다.
연구에 따르면, 종이책을 읽는 사람은 전자책 사용자에 비해 문서의 전반적 구조를 더 잘 파악하고, 정보 간의 관계성을 더 쉽게 인식한다고 합니다. 실제 2014년 노르웨이 스타방에르 대학의 연구에서는 동일한 소설을 종이책과 전자책으로 나눠 읽게 한 후, 이야기의 흐름과 시간 순서를 질문했을 때 종이책 독자들이 전자책보다 더 정확하게 줄거리를 기억했습니다. 이는 책을 물리적으로 파악하고 조작하면서 ‘인지 지도’를 그리기 때문입니다. 뇌는 내용뿐 아니라 그 정보가 어디에 위치했는지를 함께 저장하며, 이는 내용 회상에 직접적인 도움을 줍니다.
또한 종이책을 읽을 때는 집중력의 흐름이 방해받기 어렵습니다. 알림, 화면 전환, 배터리, 눈의 피로와 같은 요소가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이로 인해 독자는 보다 깊이 있는 몰입 상태에 들어갈 수 있고, 이러한 몰입은 장기 기억으로의 전환에 결정적인 요소로 작용합니다. 반면 전자책은 스마트폰이나 태블릿에서 읽는 경우가 많고, 다른 앱의 방해 요소가 상시 존재하며, 눈의 피로도가 높아 일정 시간 이상 집중을 유지하기 어렵습니다. 이 차이는 결과적으로 책의 내용을 얼마나 오랫동안, 얼마나 정확하게 기억할 수 있는가에 실질적인 영향을 줍니다.
전자책은 편리하지만, 두뇌의 기억 회로를 자극하기에는 구조적으로 한계가 있다
전자책은 이동 중이나 출퇴근길, 잠들기 전 침대에서 간편하게 책을 읽을 수 있는 장점이 있습니다. 수천 권의 책을 한 기기에 저장할 수 있고, 원하는 문장을 하이라이트하거나 메모를 남기기도 쉬우며, 사전 검색이나 페이지 이동도 빠릅니다. 하지만 이러한 ‘편리함’이 오히려 독서 과정에서 뇌가 스스로 정보를 처리하고 저장하는 과정을 단축시키는 역효과를 낳을 수 있습니다.
전자책을 읽을 때는 대부분의 사용자가 ‘디지털 리딩’ 습관을 따릅니다. 즉, 빠르게 스크롤하고, 핵심 키워드만 골라 읽거나, 문장을 ‘스캔’하듯 훑는 식으로 정보를 소비합니다. 이는 디지털 콘텐츠의 일반적인 소비 패턴과 일치하며, 특히 뉴스 기사나 SNS 글을 자주 접하는 사람일수록 책도 같은 방식으로 읽는 경향이 강해집니다. 이런 습관은 기억에 필요한 반복과 깊이 있는 이해 과정을 생략하게 만들고, 결국 책의 내용을 금방 잊게 하는 결과로 이어집니다.
더불어 전자책 기기는 대부분 조명이 내장돼 있거나, 배경색이 다양하게 바뀌는 등의 화면 설정을 제공합니다. 이로 인해 사용자는 문서의 구조보다 ‘시각 효과’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게 되며, 텍스트 자체에 집중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어떤 연구에서는 전자책의 페이지 이동 방식(스크롤 vs. 클릭)에 따라 독자의 기억 유지력이 20% 이상 차이 난다는 결과도 있었습니다. 특히 스크롤 방식은 페이지라는 구분이 모호해지면서 정보가 단절적으로 처리되는 경향을 보입니다.
또한 하이라이트 기능이나 메모 작성의 편리함은 오히려 내용을 ‘기억하려는 노력’을 줄입니다. 손으로 밑줄을 긋거나 메모하는 아날로그 방식은 뇌가 내용을 다시 해석하며 ‘내 언어’로 재구성하게 도와줍니다. 반면 전자책에서의 하이라이트는 단순 클릭에 그쳐, 뇌가 그 정보를 충분히 가공하거나 정리할 기회를 놓치게 됩니다. 요컨대, 전자책은 편리하지만 ‘정보의 깊은 정착’에는 한계가 있으며, 특히 장기적인 기억과 사고의 구조 형성에는 종이책보다 덜 효과적입니다.
기억력 향상을 위해서는 책의 물리성과 몰입 환경이 중요하다
결국 책의 내용을 오래 기억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요합니다. 첫째는 뇌가 정보를 ‘맥락’ 속에서 저장하는 환경이고, 둘째는 그 정보를 반복적으로 되새기고 정리하는 시간입니다. 종이책은 이러한 조건을 모두 충족하는 독서 매체입니다. 물리적인 책은 문장의 위치, 페이지 흐름, 책장 넘김 등의 정보를 시각·공간·촉각 자극으로 함께 제공합니다. 이는 뇌가 정보를 저장할 때 다양한 자극을 동시에 활용하게 만들어, 단순한 기억을 넘어서 ‘정보의 위치, 구조, 흐름’을 통합적으로 기억하게 만듭니다.
몰입이라는 측면에서도 종이책은 방해 요소가 적고, 독서에만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합니다. 종이책을 펴는 순간, 우리는 자연스럽게 ‘정보 소비’가 아니라 ‘정보와의 대화’를 시작하게 됩니다. 이는 책의 내용을 능동적으로 받아들이고, 내 생각을 더하며, 오래도록 기억하게 만드는 출발점이 됩니다.
전자책이 완전히 효과가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정보 검색이나 학습 개요 파악, 반복적인 훈련에는 효율적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한 권의 책을 깊이 읽고, 내용을 오랫동안 기억하며, 그 안에서 통찰을 얻고 싶다면 종이책이 여전히 가장 강력한 도구입니다. 그리고 그 효과는 단지 개인의 선호나 감정에 기반한 것이 아니라, 뇌 과학적 근거와 심리학적 결과로도 뒷받침되고 있습니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단순한 정보 수집이 아니라, 뇌의 작동 방식을 바꾸는 훈련입니다. 전자책은 빠르고 효율적이지만, 기억의 깊이나 내용의 정착력 면에서는 종이책에 미치지 못합니다. 이는 단지 인쇄물의 감성을 넘어, 뇌가 정보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처리하는지를 결정짓는 방식의 차이입니다. 종이책은 그 자체가 하나의 기억 단서이자, 물리적 정보 지도입니다. 손끝에서 느끼는 종이의 질감, 책갈피가 위치한 페이지, 마지막 장을 넘길 때의 감각은 모두 기억을 오래 남게 만드는 강력한 장치입니다.
당신이 어떤 책을 오래 기억하고 싶다면, 어떤 내용을 진짜 ‘자기 것’으로 만들고 싶다면, 종이책을 선택하세요. 느리게 읽고, 밑줄을 긋고, 다시 펼쳐보며 생각하는 그 과정 속에서 뇌는 정보를 더 깊이 저장하고, 더 오래 기억하며, 더 넓게 연결하게 될 것입니다. 디지털 시대에도 여전히 종이책이 살아남는 이유, 그것은 결국 인간의 뇌는 아날로그적 기억을 더 잘 받아들이도록 설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